18세기 조선 후기, 국왕 정조는 학문과 지식으로 국가를 운영하려는 전례 없는 시도를 감행했다. 그 중심에는 ‘지식의 집대성’을 통해 백성과 관료, 왕실까지 연결하고자 한 거대한 출판 프로젝트가 있었다. 바로 청나라의 대형 백과사전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도입해 조선식으로 번각(印刷)하고 보급하려는 계획이다. 이 사업은 단순히 책을 수입하고 인쇄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조선의 실용학문과 행정, 정치 철학, 문물 정비까지 아우르는 국가적 지식 리빌딩 작업이었다. 이 글에서는 정조가 왜 고금도서집성을 번각하려 했는지, 그 작업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조선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고찰해본다.
고금도서집성 개요와 조선 반입
| 항목 | 내용 |
|---|---|
| 서명 | 고금도서집성 (古今圖書集成) |
| 출판국 | 청나라 옹정제 시기 (1726년 완성) |
| 총 분량 | 1만 권 이상 / 1억 6천만 자 / 1,600책 규모 |
| 조선 반입 | 정조 즉위 직후 수입, 규장각에 보관 |
| 조선 내 활용 | 필사 → 번역 → 편집 → 실용서로 재구성 |
왜 정조는 고금도서집성을 번각하려 했는가?
1. 국가 행정의 기반 문헌 확보
2. 실학 기반 학문 체계 정비
3. 서양 과학·중국 문물 정리된 백과로서 정보 갱신 가능
4. 규장각을 통한 문치주의 강화
5. 후대 관료와 세자 교육용 표준 교재로 사용하기 위함 정조는 단순히 기존 조선의 유교 경전만으로는 시대 변화에 대응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천문, 의학, 농업, 공예, 외교, 병법까지 아우른 고금도서집성을 조선화하려 했다.
번각 사업의 구체적 추진 방식
정조는 규장각 내에 필사관과 검서관을 배치하고, 수십 권에 달하는 책을 분업화하여 필사하게 했다. 직접 필사한 원고는 다시 언해(한문 → 한글식 번역)를 거치거나, 조선 실정에 맞게 축약·편집되었다. 번각은 목판을 새로 제작해 인쇄하는 방식이었으며, 한양 인근 활판소에 분산 발주되기도 했다. 대표 번각 추진 사례:
- 농정 관련 서적: 정조가 백성의 생업 안정 위해 우선 편집
- 무예 관련 항목: 무예도보통지와 연결해 활용
- 의학 지식: 향약집성방 등과 비교 대조
문화사적 의미 – 단순 수입을 넘어선 재해석
정조의 고금도서집성 번각 사업은 지식 수입이 아닌 지식 주권 회복의 선언이었다. 중국 책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 아니라, 그 방대한 정보 속에서 조선의 현실에 필요한 부분만 선별하여 다시 재배열하고 해석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실학자들은 자신만의 해석, 주석, 비판을 덧붙였고, 이는 지식의 조선화, 문명의 토착화라는 관점에서 매우 큰 문화사적 전환점을 만들었다.
정조 이후, 이 사업이 미친 영향
고금도서집성 번각 작업은 정조 사후에 크게 위축되었지만, 그 지향은 여러 실용 서적 출판, 지방 교육 확대, 사가 학문 발전 등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정약용은 이 백과를 바탕으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의 저술 방향을 확장했고, 향촌 사족들도 고금도서집성 내용을 활용해 가훈, 가법, 사문을 정비했다. 조선 후기의 지식 확산은 이 사업을 기점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결론: 책으로 나라를 설계한 정조의 위대한 시도
고금도서집성 번각은 단순한 출판사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조가 구상한 지식 기반 통치 전략, 그리고 지식을 통해 민심과 정치를 동시에 다스리려는 시도의 정수였다. 그 방대한 문헌 속에서 조선의 새로운 미래를 찾으려 했던 정조의 의지는 오늘날까지도 ‘정보와 지식이 어떻게 나라를 바꿀 수 있는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남긴다. 지식을 수입하되, 그대로 복사하지 않고 재해석하고, 재구성한 이 문화적 시도는 디지털 시대인 지금에도 귀중한 모델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