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지식 행정은 단순히 많은 책을 보유하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방대한 정보와 문헌을 어떻게 정리하고, 필요할 때 얼마나 신속하게 활용할 수 있느냐였다. 정조는 규장각을 단순한 왕립 도서관이 아닌, 국가 행정의 지식 기반으로 만들기 위해 문서 분류 체계를 정교하게 설계했다. 이 글은 규장각 내부의 문헌 분류 방식과 그 행정적, 정보관리적 의미를 분석한다.
규장각의 문서 분류 기본 구조
| 분류 항목 | 내용 |
|---|---|
| 경류 | 유교 경전 중심 문헌 – 사서오경 등 |
| 사류 | 역사서 및 편년체 문헌 – 삼국사기, 자치통감 등 |
| 자류 | 문장, 수필, 백과 등 실용 문헌 – 성호사설, 고금도서집성 |
| 집류 | 문집 및 개인 저작물 – 정약용, 이덕무 등 |
| 서류 | 서예 관련 문헌 및 필사 견본 |
분류 체계의 목적은 정보 활용에 있었다
문서를 체계적으로 분류한 이유는 단순히 보기 좋게 보관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정조는 검서관과 규장각 관원들에게 “어떤 주제에 대한 정책을 만들기 위해선 관련 문서를 즉시 꺼내어 볼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말은 곧, 규장각의 문서 분류는 정책 설계와 직접 연결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서고 내 배치 방식과 정보 접근성
문서는 단지 분류만 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체계적인 배치를 따랐다. 핵심 문헌은 중앙 서가에 배치되었고, 실무용 문서나 참고용 자료는 외부 별실에 구비되었다. 또한 중요 문서에는 검서관이 작성한 주석과 참고 색인표가 붙어 있어 관원들이 쉽게 핵심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이는 조선판 카드 색인 시스템이자 오늘날 데이터베이스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검서관의 분류 업무와 정보 조직
문서 분류는 단순한 정리 작업이 아니었다. 검서관들은 각 문헌의 내용, 저자, 시기, 분야를 고려해 적절한 분류 항목을 결정해야 했고, 동시에 동일 주제를 다루는 다른 문헌들과의 연계성도 분석했다. 이러한 작업은 곧 지식 간의 연결 구조를 만드는 일이며, 정보 조직이라는 현대적 개념의 초석을 다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정보 활용을 위한 색인과 주석 시스템
규장각은 문서를 정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문서마다 핵심 주제, 주요 인용문, 관련 문헌 정보를 별도로 정리했다. 이는 오늘날의 색인(index) 시스템과 유사하며, 특정 문제를 연구하거나 정책을 검토할 때 관련 정보를 효율적으로 찾아낼 수 있도록 한 체계적 장치였다.
문서 관리에서 행정 효율로
이처럼 정조 시기의 규장각은 단지 책을 모아두는 공간이 아니라, 지식을 체계적으로 가공하고 분류하여 행정에 직접 활용할 수 있는 조선판 정보 행정기관이었다. 검서관과 실무 관료들이 이 구조 속에서 성장했고, 실학자들은 이 시스템을 통해 실용적인 지식 정치의 가능성을 체감했다.
결론: 정조가 만든 국가 지식 엔진
규장각의 분류 체계는 오늘날 행정 정보 시스템과 다를 바 없는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분야별 분류, 색인 시스템, 주제별 연결망, 실무 접근성까지 고려된 이 설계는 정조가 왜 지식을 통치의 근간으로 삼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책은 곧 정책이었고, 정보는 권력이었다. 그 중심에는 규장각이라는 조선판 지식 엔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