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신분 구조는 흔히 양반과 상민의 이분법으로 이해되지만, 실제로 그 사이에는 중요한 ‘중간 계층’이 존재했다. 바로 중인이다. 중인은 기술관료, 역관, 의관, 율관, 서리, 화원 등 전문성과 실무 능력을 갖춘 계층으로, 특히 조선 후기 도시화와 실용지식의 확산 속에서 존재감이 급부상했다. 이들은 문과(대과) 응시는 사실상 차단되었지만, 잡과를 통해 시험 제도에 도전했고, 학문과 문화 활동에서도 주체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번 글에서는 조선 후기 중인 계층의 사회적 부상과, 그들이 과거시험이라는 제도에 어떻게 도전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 중인의 정의와 주요 직역
중인은 ‘중간 사람’이라는 뜻으로, 양반보다는 아래지만 상민보다는 위인 계층을 의미했다. 출신은 다양했지만, 대부분 기술·실무·전문직에서 활동했으며, 세습적 직업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문과에는 응시할 수 없었지만, 잡과에는 응시할 수 있었다. 잡과는 의과(醫科), 율과(法科), 천문·지리·역산 등 이과계열 과목, 그리고 외국어 역과 등이 포함됐다.
📌 중인이 응시할 수 있었던 과거 종류 정리
| 과거 종류 | 응시 가능 여부 | 비고 |
|---|---|---|
| 문과 (대과) | 사실상 불가능 | 신분상 양반만 허용 |
| 무과 | 가능 | 군역 출신 중심, 중인 중 일부 도전 |
| 잡과 | 가능 | 의과, 율과, 천문, 산학, 역과 등 포함 |
| 향시 (지방 시험) | 제한적으로 가능 | 생원/진사 자격은 불가능한 경우 다수 |
📌 중인의 과거시험 도전 양상
잡과는 실용 기술 중심의 과거시험이었고, 중인들은 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 의과: 한의학, 외과, 침구술 등 전통 의술 시험 - 율과: 형벌법, 송사 처리 능력 중심의 법률 시험
- 산학과: 수학, 회계 능력 중심의 시험
- 역과: 청어(중국어), 일본어, 여진어 등 외국어 시험 중인은 실무 중심의 교육을 받았고, 실제 업무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이 시험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했다. 특히 역관은 외교와 무역에서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국가적으로도 필요성이 컸다.
📌 조선 후기 중인의 사회적 부상 배경
조선 후기로 갈수록 실학의 부상, 도시 발달, 상업 확장이 일어나면서 중인 계층은 문화적 중심축으로 성장했다.
- 한양의 규방문화, 풍속화, 시사(詩社) 활동은 대부분 중인에 의해 주도되었고,
-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 실학자 중 상당수가 중인 또는 서얼 출신이었다. - 특히 규장각 설치 이후, 정조는 중인과 서얼을 등용해 검서관, 기록 담당자로 활용했다.
📌 실제 인물 사례: 중인의 시험 도전과 성공
- 이덕무 (1741~1793) – 역관 가문 출신으로 문장력과 학문으로 정조의 눈에 띄어 규장각 검서관으로 임명됨.
- 박제가 (1750~1805) – 중인 계층의 대표적 실학자. 정조의 탕평책에 힘입어 규장각에서 활동.
- 홍봉한 가문 의관들 – 여러 세대에 걸쳐 의과를 통해 과거 급제 후 내의원에서 활동하며 왕실 의술 책임.
📌 한계와 차별도 여전했다
중인은 잡과를 통해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지만, 승진 한계가 명확했다. 정5품 이상 진출이 어려웠고, 문관으로의 전환도 불가능했으며, 양반 사회에서는 여전히 ‘기술직 출신’으로 낮게 평가되었다. 결혼, 거주지 제한, 사회적 교류에서도 제약이 따랐고, 이는 중인들이 독자적인 문예 공동체(시사)를 형성하는 원인이 되었다.
📌 결론: 중인은 시험과 문화를 통해 조선 후기의 중심에 섰다
조선의 중인은 제도의 벽 안에서 제한된 기회를 가지고 있었지만, 시험과 실력, 문화 활동을 통해 존재감을 키워나간 계층이었다. 과거시험이라는 통로는 그들에게 완전히 열려 있지는 않았지만, 잡과라는 틈새 제도를 통해 국가 시스템에 진입하고, 문화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오늘날에도 전문직, 실무직, 실용지식인의 사회적 위치가 다시 논의되는 가운데, 조선 후기 중인들의 도전과 문화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출신이 아닌 실력으로 증명하려는 이들, 바로 그들이 조선의 또 다른 주인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