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과거시험은 성리학적 이상과 공정함을 상징하는 제도였지만, 실제 역사 속 과거시험은 수많은 부정행위와 조작 사건으로 얼룩져 있었다. 과거는 단순한 시험이 아니라 곧바로 권력과 명예, 부를 가져오는 통로였기에 시험을 둘러싼 유혹은 끊이지 않았다. 왕실 내부의 개입, 출제자의 편파성, 감독관의 뇌물 수수, 대리시험 등 현대 사회에서도 볼 수 있는 모든 부정이 이미 조선에서 존재했다. 이 글에서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과거시험 속 부정행위 실태와 주요 사건들을 정리하고 그 정치적 의미를 분석한다.
📌 왜 과거시험에 부정이 끊이지 않았는가?
조선에서 과거시험은 단순한 '합격'이 아닌, 인생의 신분을 바꾸는 통로였다. 양반이 아니더라도 문과에 급제하면 정식 관료가 될 수 있었고, 부와 권력을 모두 얻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정직한 실력보다 '연줄', '배경', '로비'가 중시되기도 했으며, 과거시험은 공정함을 유지하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특히 출제자와 채점자가 시험 응시자의 사제 관계일 경우, 편파적인 평가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 역사 속 주요 부정행위 사례 정리
| 연도 | 사건명 | 부정행위 유형 | 결과 |
|---|---|---|---|
| 1498년 (연산군 4년) | 무오사화 연루 과거 | 출제자가 사림을 밀어줌 | 사림 탄압의 빌미가 됨 |
| 1591년 (선조 24년) | 정여립 사건 | 정치 성향이 같은 인물 급제 유도 | 급제자 대거 숙청 |
| 1730년 (영조 6년) | 답안지 바꿔치기 사건 | 감독관이 응시자 답안 대리 작성 | 감독관 파직, 급제자 취소 |
| 1809년 (순조 9년) | 안동 김씨 급제 조작 | 세도가 집안 출신 집중 합격 | 과거시험 공정성 논란 확대 |
📌 대리시험, 정답 유출, 채점 조작… 조선판 ‘입시비리’
조선 후기에는 대리시험도 벌어졌다. 양반 자제가 병을 핑계로 다른 유생을 대신 시험장에 들여보내는 경우가 있었고, 심지어 집안 어른이 아들의 이름으로 대신 글을 써 제출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정답 유출은 시험 전날 출제자와 관련된 문하생이나 사제지간에게 미리 문제가 전달되는 형태로 이뤄졌으며, 이런 문제는 지방의 향시(鄕試)에서 더 심각했다. 또한 채점 과정에서 권세가의 청탁을 받은 채점관이 높은 점수를 부여하거나, 의도적으로 특정 인물을 탈락시키는 일도 빈번하게 벌어졌다.
📌 왕의 개입과 출제 방향의 정치화
일부 국왕은 과거시험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했다.
- 세종은 과거시험에서 실용학문 문제를 내며 유교 경전 중심의 시험을 비판적으로 조정했다.
- 영조는 탕평책의 일환으로 특정 붕당 출신을 의도적으로 합격시키거나 배제했다.
- 정조는 규장각 검서관들을 통해 시험제도 자체를 개혁하려 했지만, 정치적 반발에 부딪혔다. 왕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된 시험은 결국 공정성보다 정치적 유불리를 우선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 시험 제도에 대한 조선 지식인의 비판
실학자들은 과거시험이 성리학 경전 중심이라는 점, 실용 지식이 배제된다는 점, 신분제 사회의 벽을 넘지 못한다는 점을 비판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시험은 능력을 보는 것이 아니라 문체를 겨루는 장이 되었다”고 평하며, 시험이 실질적 행정 능력을 반영하지 못함을 지적했다. 또한 그는 시험을 본 사람보다 시험을 낸 사람과 채점한 사람의 책임이 더 중요하다는 의견도 함께 남겼다.
📌 결론: 조선의 시험은 무엇을 평가했는가?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공정’이라는 가면을 썼지만, 그 안에는 권력, 계급, 정치, 부정이 얽혀 있었다. 시험은 실력을 평가하는 도구였지만, 동시에 권력을 재생산하는 장치이기도 했다. 역사를 돌아보면 시험 자체보다도 그 시험을 움직이는 ‘사람과 구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험의 공정성은 사회적 화두다. 조선의 과거시험이 남긴 교훈은 단순히 옛 제도의 흠결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에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